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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지식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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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왕조 빤댜 왕조(பாண்டியதேசம், Pandya dynasty) 작성일 19-06-28
시기

1차 B.C. 3세기 ~ 기원후 3세기, 2차 6세기 ~ 920년, 3차 12세기 ~ 1345년

수도

마두라이(인도 남부 타밀나두 주의 도시)

주요왕들

<초기 빤댜 왕국 시기> Kadungon (r. c. 590–620 CE) Maravarman Avani Sulamani (r. c. 620-645 CE) Jayantavarman alias Seliyan Sendan (r. c. 645–670 CE) Arikesari Maravarman (r. c. 670–700 CE) Kochadaiyan Ranadhiran (r. c. 700–730 CE) Maravarman Rajasimha I (r. c. 735–765 CE) Jatila Parantaka Nedunjadayan (r. c. 765–815 CE) Maravarman Rajasimha II (r. c. 815–817 CE) Varaguna I (r. c. 817–835 CE) Srimara Srivallabha (r. c. 815–862 CE) Varaguna II (r. c. 862–885 CE) Parantaka Viranarayanan (r. c. 880–905 CE) Maravarman Rajasimha III (r. c. 905–920 CE) <촐라 왕국 지배시절> Sundara Pandya I Vira Pandya I Vira Pandya II Amarabhujanga Tivrakopa Jatavarman Sundara Chola Pandya Maravarman Vikrama Chola Pandya Maravarman Parakrama Chola Pandya Jatavarman Chola Pandya Seervallabha Manakulachala (1101–1124 CE) Maaravarman Seervallaban (1132–1161 CE) <두번째 빤댜 왕국 시기> Parakrama Pandyan I (1161–1162 CE) Kulasekara Pandyan III Vira Pandyan III Jatavarman Srivallaban (1175–1180 CE) Jatavarman Kulasekaran I (1190–1216 CE)[71] Parakrama Pandyan II (king of Polonnaruwa) (1212–1215 CE) Maravarman Sundara Pandyan(1216–1238 CE) Sundaravarman Kulasekaran II (1238–1240 CE) Maravarman Sundara Pandyan II (1238–1251 CE) Jatavarman Sundara Pandyan (1251–1268 CE) Maravarman Kulasekara Pandyan I (1268–1310 CE) Sundara Pandyan IV (1309–1327 CE) Vira Pandyan IV (1309–1345 CE)

29개주

타밀 나두 주

왕조약사

빤댜 왕조는 인도의 고대 타밀 왕조로, 촐라 왕조와 체라 왕조와 더불어 3대 타밀 왕조 중 하나이다. 이 세 왕조의 왕들을 타밀라캄의 삼왕(三王이)라고 불렀다. 초기 빤댜 왕조는 약 기원전 4세기부터 남부 인도의 일부 지역을 통치했는데, 이 통치는 16세기 초반에 끝이 났다. 처음에 인도 반도의 최남단에 있는 항구인 코카이의 ‘빤댜 나두’를 통치했고, 이후 마두라이로 수도를 옮겼다. 빤댜 왕조는 로마와도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빤댜 왕조는 사원의 중심지로서, 마두라이의 메나크시 사원과 티루넬벨리의 넬리아파르 사원 등이 유명하다. 자이나교, 시바교, 비슈누교 등은 초기 빤댜 왕조에서는 번성하였으나 카둔곤 왕의 치세에서는 힌두교 이외의 종파는 쇠퇴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빤댜 왕조의 후원 아래 마두라이에서 전설적인 타밀계 학자와 시인들이 모여 토론과 문학회를 여는 아카데미인 상감(Sangam)이 열렸고, 빤댜 왕들 중 일부는 스스로가 시인이었다. 빤댜 왕조 초기 상감 문학은 칼라브라 왕국의 침입으로 사라졌었다. 6세기 초 카둔곤 왕의 치세에서 빤댜 왕조가 부활하여, 칼리브라 왕국을 타밀국 밖으로 밀어내고 마두라이를 다시 통치했다. 그러나 9세기에 촐라 왕국이 등장하며, 끊임없는 전쟁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빤댜 왕조는 13세기 후반이 될 때까지 싱할레스 왕국, 체라 왕국과 동맹을 맺고 촐라왕국과 대립하였다. 이후 판다야 왕조는 마라바르만 순다라 빤댜 왕과 자타바르만 순다라 빤댜 왕(c. 1251) 휘하의 황금기(1216~1345)에 들어섰다. 이 두 왕의 치세에서 판다야 왕조는 텔루구 왕국까지 제국을 확장하였으며 칼링가(현 오리사 지역)을 정복했고 스리랑카를 침공하여 흡수하였다. 또한 동남아시아의 스리비자야 왕국 그리고 그들의 후계 왕조와도 광범위한 무역 관계를 맺었다. 빤댜 왕국은 무역과 문학에서 모두 뛰어났으며, 고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진주를 생산하는 남인도 연안의 진주 어장 역시 보유하고 있었다. 빤댜 왕조는 팔라바 왕국, 촐라 왕국, 호이샬라 왕국 그리고 델리 지역의 술탄이 다스리는 이슬람 침략자들과 계속해서 마찰을 빚었다. 이슬람 세력의 침략은 남인도 지역에서 빤댜 왕조의 패권을 종식시켰고, 1323년 스리랑카의 자프나 왕국은 무너진 빤댜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빤댜는 1335년 수도 마두라이를 마두라이 술탄테라는 신흥 왕조에 빼앗겼다. 마두라이 술탄테는 수도를 텐카시로 옮기고 계속해서 티룰넬레벨리, 티티코린, 라마나드, 시바 강가 지역을 계속 통치했다. 1378년 비자야나가라 왕조에 마두라이가 귀속되면서 마두라이 지역은 나야카 총독이 다스리게 되었다. 1529년 나야카 총독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마두라이 나야크(Madurai Nayak) 왕조를 세웠다. 1. 역사 1) 초기 빤댜 왕국(기원후 6세기 –10세기) 6세기 칼리브라 왕국을 물리친 카둔곤 왕에 의해 최초의 빤댜 제국이 세워졌다. 빤댜 왕조 왕들의 연대기 목록은 바이가이 강 바닥에서 발굴된 비문에 기초하여 알려져 있다. 건국 이후 빤댜 왕국은 영토를 꾸준히 확장하고 세력을 넓혀 나갔으며 타밀계 제국은 카베리 강을 경예로 하여 팔라바 제국과 빤댜 제국으로 나뉘게 되었다. 촐라왕국의 바자얄라야 촐라 왕이 850년경 빤댜 제국의 후손이었던 무타라얄 족장들을 물리치면서 빤댜는 점차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빤댜의 후손들은 끊임없이 촐라왕국의 경계선을 침략하였다. 빤댜 왕조는 지배력과 영토와 명예를 잃었으나 촐라왕국에 전적으로 복종하지 않았다. 첼라왕국과 란카왕조와 다양한 동맹을 맺으려고 시도하였으며 촐라의 패권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단행하였다. 파라타카 1세 시대부터 12세기 초, 쿨로퉁가 촐라(f Kulottunga Chola) 왕조 시대(880년~1215년)까지 인도 남인도-데칸-동서해안까지 아우르는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남아 있었다. 2) 촐라왕국 지배 시절(10세기- 13세기) 타밀 왕국에 대한 촐라왕국의 지배는 파라티카 촐라 2세부터 본격화되었다. 이후 촐라왕국과 빤댜 왕국의 전쟁에서 파라타카 초라 2세의 아들 아디트아 카리칼라가 이끄는 촐라왕국의 군대가 싱할레스 군의 도움을 받은 빤댜 왕국의 비라 빤댜 왕을 이겼다. 이 패배로 인해 빤댜 왕조는 그들의 영토에서 쫓겨나 스리랑카로 피신하였으며 이때부터 촐라왕국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빤댜 왕조의 영토는 C. 1020 CE부터 촐라에서 파견된 총독이 다스렸으며, ‘촐라 빤댜’라는 칭호로 바뀌었다. 라자드히라자 3세는 쿨세크하라 빤댜 3세를 도와서 싱할레스의 군대를 물리쳤으며 이후 마두라이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3) 두 번째 빤댜 왕국 (13세기 – 14세기) 13세기는 빤댜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대다. 이 시기에는 7명의 위대한 황제가 있었으며, 이들은 왕자들과 함꼐 왕국을 통치했다. 그들의 힘은 13세기 중반 자타바르만 순다라 판디얀 치하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러한 대제국의 토대는 13세기 초에 마라바르만 순다라 판디얀에 의해 세워졌다. 수세기 동안 팔라바 왕국과 촐라 왕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빤댜 왕국은 1251년 자타바르만 순다라 판디얀 1세에 의해 잠시 전성기를 되찾았다. 빤댜 왕국의 영향력은 고다바리 강의 근처의 텔루구 국가로부터 스리랑카까지 확장되었다. 1258년 자타바르만 순다라 빤댜 1세가 이 지역을 침략하였고, 이후 동생인 자타바르만 비라 판디얀 2세가 뒤를 이어 1262년부터 1264년까지 세력을 지속해 나갔다. 빤댜 왕국은 반도 전체를 지배하고 촐라 왕국과 호이샬라 왕국의 영향력을 축소시켜 ‘체라 나두’와 ‘스리랑카 빤댜’ 주를 세웠다. 후에 자타바르만 순다라 빤댜는 그의 동생을 콩우 왕국, 촐라 왕국, 호이샬라 왕국을 다스리도록 임명했다. 쿠로툰가 촐라 3세와 그의 후계자이자 호이샬라의 왕인 라자라자 촐라 3세의 혼인동맹은 빤댜 왕조의 부활에 대항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촐라왕조는 호이샬라 왕 비라 솜슈가라 휘하의 호이살라 세력들의 도움으로 다시 지배권을 회복했다. 마라바르만 순다라 판다야 1세의 후계자인 마라바르만 순다라 판다얀 2세는 1250년경 라젠드라 촐라 3세에게 패했다. 자타바르만 순다라 빤댜 1세는 서기 1258~1260년경에 라젠드라 촐라 3세를 제압했으며, 호이샬라 왕조의 대등한 적대자였다. 그는 먼저 칸치푸람과 주변에 주둔하고 있던 호이샬라군에 도전하여 그들의 지휘관 몇 명을 사살한 코페루차 2세 휘하의 카다바 팔라바 왕국을 격파했다. 1260년경, 자타바르만 1세는 호야살라 왕국을 전쟁에 끌어들였으며, 아들들에게 제국의 지배권을 넘겨준 비라 솜슈가라 호이살라는 자타바르만에게 도전하였으나 그의 군대는 전쟁에서 대패하였으며 이 전투에서 비라 솜슈가라는 목숨을 잃었다. 다음으로 자타바르만 1세가 노린 것은 촐라 왕국으로, 자타바르만은 티루치라팔리 지역과 티루바랑암 지역을 중심으로 빤댜 세력을 통합하고 탄자부르 지역과 쿰바코남 지역을 향해 진군했다. 자타바르만 1세의 도전을 받은 라젠드라 3세는 호야살라 왕국으로부터의 지원과 전쟁 참여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미 패한 호이샬라 왕국은 또다시 전쟁에 나가 패배를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카다바 팔라바 왕국, 호이샬라 왕국, 텔루구 초다 왕국 등을 격파한 자타바르만 순다라 빤디얀는 라젠드라 3세를 자신의 신하가 되도록 강요했다. 자타바르만 순다라 빤디얀은 1258년 스리랑카를 침공하여 자바카 왕 찬드라바누를 물리침으로써 자프나 왕국을 장악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찬드라바누와 두 명의 싱할리스 왕자는 1270년 빤댜 왕국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1270년 자타바르만 순다라 판다얀 1세, 자타바르만 비라 빤디얀 2세의 동생에 의해 최후의 패배를 맞았다. 1279년경 호이샬라의 라마나타(Roysala Ramanatha)와 라젠드라 촐라 3세의 연합군은 마라바르만 쿨라세카라 빤디얀 1세에게 패하여 촐라 왕조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1314년 쿠스로 칸(라터 술탄 나시르-우드-딘)이 이끄는 칼지 술탄테(Khalji Sultaate)의 원정과 1323년 술탄 기야트 알-딘 투글루크 치하의 우루그 칸(Muhammammad bin Tughluq)이 이끄는 원정이 있었다. 이 두 번의 침략이 빤댜 왕국을 완전히 파괴하여 다시재기하기 힘들도록 하였다. 이전의 침입은 단순한 약탈이었으며, 쿠스로 칸은 약탈로 만족하였으나, 우루그 칸은 이전의 빤댜 왕국의 지배권을 획득하여 빤댜 왕국의 영토를 델리 술탄테 내 마바르 지방으로 병합했다. 남인도 대부분은 델리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데바기리, 타일링, 캄필리, 도라사무드라, 마바 등 5개 주로 나뉘었다. 잘랄루딘 아산 칸은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가 새로 만든 델리 술탄테의 최남단 마바르 지방의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1333년 잘랄루딘 아산 칸은 독립을 선언하고 마두라이 시에 본거지를 둔 소왕국 마두라이 술탄테를 만들었다. 이후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북카라야 1세는 1371년 마두라이 시를 정복하여 술탄을 감금하고, 아코트의 타밀 왕자 삼부바 라야를 석방하고 왕위에 복위시켰다. 그 후 코네리 라야가 왕위를 계승했다. 북카라야 1세는 그의 아들 베라 쿠마라 캄파나를 이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후, 1736년까지 이 지역을 통치하는 나야카 주지사가 임명되었다. 빤댜 왕조는 팔라바 왕국, 촐라 왕국, 호이샬라 왕조, 델리 술탄테 출신의 이슬람 침략자들과 계속해서 마찰을 겪었으며, 이슬람 지배자들에 의해 빤댜 왕조는 멸망하게 되었다. 2. 문화 진주 어장 산업은 고대 빤댜 제국에서 번창했던 산업으로, 항구도시 코카이(Korkai)는 진주 무역의 중심지였다. 그리스와 이집트 항해자들의 서면 기록 중 에리트레이안해의 페리푸스는 "인도에서 소비되지 않는 질이 낮은 진주는 아폴로가와 오마나의 시장에서 대량으로 수출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타밀지역에서 사용하지 않던 질 낮은 진주조차도 외국 시장에서 매우 큰 수요를 보였던 것이다. 진주는 아주 질좋은 모슬린 천으로 포장되어서 수출되었다. 로마제국이 인도로부터 수입한 가장 비싼 제품은 만나르 만에서 나온 진주였으며 빤댜 왕국의 진주도 북인도 왕국에서 수요가 있었다. 왕실의 전차들을 끌고 가는 말들조차 진주로 꾸며져 있었으며, 진주의 사용량이 워낙 많아 진주의 공급이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진주 어장에 대한 문헌상의 언급은 바다에 뛰어들고 상어의 공격을 피한 어부들이 어떻게 오른쪽으로 휘어진 껍질을 들고 소리나는 껍데기를 불었는지 등이 나타나있다. 메가스테네스는 판다스의 진주 어장에 대해 보고했는데, 빤댜 제국이 진주 무역에서 막대한 부를 얻었음을 알 수 있다. 타밀계 학자와 시인들이 모여 토론과 문학회를 여는 아카데미인 상감(Sangam)에서 파생된 상감 문학에서 빤댜 왕조의 왕들은 많이 언급되고 있다. 그 중 '탈라이얄랑가의 승리자'인 네둔젤리얀 2세와 '희생의 무두쿠디미 페루발루디'는 특별하게 언급되고 있다. 전통 타밀 시 형태인 아카누루와 푸라누루에서 발견되는 몇 편의 짧은 시 외에도, 상감문학 중 빤댜 왕국의 사회와 상업 활동을 엿볼 수 있는 두 개의 주요 작품인 마투라이칸키와 넷발트바타이(Pattunvatai)가 있다. 이 작품들에서 작가 만쿠디 마루타나르는 그의 후원자인 네둔체지얀 왕을 코카이의 영주로, 남부 파라다바의 군벌로 언급하고 있다. 실라파티카람은 빤댜 왕국의 상징이 물고기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빤댜 왕조는 여러 가지 칭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한 가지가 ‘물고기의 남자’ 로, 빤댜 왕국이 어부가 세운 나라라는 기원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타밀 왕국들의 초기 동전은 촐라 왕국, 빤댜 왕국, 첼라 왕국을 나타내는 세 명의 왕관을 쓴 왕들, 호랑이, 물고기, 활 등이 묘사되어 있었다. 빤댜 왕국의 초기 동전은 구리동전에 은으로 된 펀치 마크가 찍혀진 채 형태였다. 이후 빤댜 통치자들이 새겨진 몇 개의 금화도 발굴되었으며, 이 동전들은 물고기 이미지 역시 하나 또는 둘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처럼 물고기 기호를 가진 동전은 '코단다라만'과 '칸치 발랑금 페루말'이라고 불렸다. 이 외에도, '엘람탈라이야남'은 한쪽 면에는 서 있는 왕이 있고 다른 한쪽에 물고기가 있는 동전들을 뜻하며, '코네니라얀'은 황소가 있는 동전, '칼리가라만'은 발 한 쌍을 그린 동전을 뜻한다. 3. 유적 바위를 잘라 사원을 건축한 것은 빤댜 건축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으로 비마나와 만다파는 초기 빤댜 사원중 가장 유명한 사원이다. 타밀 나두의 티루치라팔리 지역에 작은 사원들이 무리지어 건축되어 있으며, 시바 사원은 황소의 조형물을 가지고 있다. 빤댜 왕조 후기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비마나(탑 형태로 지어진 힌두 사원)의 고푸람(사원의 직사각형 입구와 문)이 개발되었다. 마두라이의 메나크시 암만 사원과 티루넬벨리의 넬리아파르 사원은 빤댜 왕조 시절에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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